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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3 조선닷컴] [Why] “아들 셋 서울大 보낸 여자? 나는 믿고 내버려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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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6-04-23 15:10 조회2,1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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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16/2015111602354.html

 

[Why] “아들 셋 서울大 보낸 여자? 나는 믿고 내버려둔 엄마”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송혜진 기자의 느낌] 가수 이적 엄마… '대한민국 엄마들의 멘토' 여성학자 박혜란

과외는 물론 숙제 검사 한번 안해
막내 고3 땐 연구하러 혼자 중국行 '아이 망칠 엄마' 소리까지 들어
아들 셋 모두 서울대 합격하자 '애 잘 키운 여성학자'라며 강연 요청
"쉽게 키우면 쉽게 자라" … 20년간 되풀이
당장 수첩에 받아 적을 '비법'에 목마른 엄마라면 여성학자 박혜란(69)의 이야기는 꽤나 허무할 것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시키면서 아이를 키워도 괜찮은가요?"라고 묻자 그는 '이 질문을 또 듣는구나'라는 표정으로 씩 웃더니 또박또박 경쾌하게 대답했다. "응, 정말로 그렇다니까. 믿어봐요."

한때 그는 '아이 망칠 엄마' 소리를 듣던 여자였다. 아들 셋을 과외 한번 시켜본 적 없이 키웠다. 막내아들이 고3일 때 아이를 내버려두고 혼자 중국 옌볜에서 여성학 프로젝트 연구를 하며 1년을 보낸 적도 있다. 1995년 막내아들까지 모두 서울대에 합격하자 세상은 갑자기 그를 향해 '애 잘 키운 여성학자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수 이적(본명 이동준·41)의 엄마로도 유명한 박혜란은 1996년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펴내며 그렇게 대한민국 엄마들의 멘토가 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그에게 강연을 요청했고, 엄마들은 말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박혜란은 그들 앞에서 지난 20년 동안 똑같고도 뻔한 얘기를 했다. "아이를 쉽게 키우면 돼요. 그러면 쉽게 자라요."

지난달 박혜란은 새 책을 한 권 더 펴냈다. '엄마 공부'라는 책이다.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엄마들의 갈대 같은 마음을 잡아주기 위한 글귀들을 엮은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한 구절인 '아이들은 그대들을 통해 이 세상에 왔을 뿐, 그대들의 것은 아니다' 같은 문구도 있다. 11일 오전 서울 서초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혜란은 "요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30~40대 엄마들을 참 많이 만나는데, 다들 내게 아이 걱정을 한 보따리씩 풀어놓는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그중 정말로 걱정할 일은 정작 별로 없더라"고 말했다.
 
박혜란 박혜란은 참 잘 웃는 사람이었다. 짧게 깎은 반백의 헤어스타일, 멋을 안 낸 듯 멋스러운 차림새. 그리고 가지런한 하얀 치아. 그는 사진 촬영 내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엄마들 힘내요!”라고 엄지손가락을 내밀기도 했다. 보고만 있어도 그 활력에 감전될 것만 같았다. /이태경 기자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까요

―걱정할 게 없다뇨?

"제일 많이 듣는 걱정이 '우리 아이가 느리다'예요. '나중에 시험 볼 때 답도 느리게 쓰면 어떡하죠'라고 묻죠. 난 대답합니다. '그걸 왜 지금 걱정합니까. 당신 아이는 이제 다섯 살인데.' 그다음으로 듣는 걱정은 '아이가 인터넷 중독이다'라는 거예요. 나는 그럼 '아이가 모든 것을 접고 학교도 안 다니냐'라고 묻죠. 보통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해요. 나는 대답하죠. '건강이 걱정되니 시간을 줄이자'고 말하라고. '너 그러다 대학도 못 간다'라고 말하지 말고요."

―아들 셋을 사교육 한번 안 시키고 모두 서울대를 보낸 건 20년 전 얘기 아닙니까. 요새는 훨씬 더 치열하고요.

"우리 때도 치열하고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어요. 1970년대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은 첫 세대가 우리예요. 한 반에 아이들이 100명씩 들어갈 정도로 많아서 2부제 수업을 했고, 엄마들은 '공교육만 믿다간 큰일 나겠다'고 했죠.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만 해도 한글도 못 떼고 들어간 건 우리 아이밖에 없었어요. 다들 선행학습을 했고 학습지·비밀과외·학원이 난립했어요. '너 그렇게 애 놔두다가 망친다'는 식의 협박은 그때부터 이미 셀 수 없이 들었어요. 지금과 다를 게 없죠."

박혜란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6년 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 1974년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회사를 관두고 10년간 첫째 동훈, 둘째 동준, 셋째 동윤을 키웠다. 첫째 아들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와 건축가가 됐고, 둘째는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뮤지션, 셋째는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방송국 PD가 됐다. 아이를 키우면서 과외 한번 시키지 않은 건 물론이고, 알림장을 확인하고 숙제를 했는지 물어본 적도, 시험 범위를 확인한 적도 없다. 박혜란은 "그걸 왜 내가 하느냐"고 반문했다.

―엄마가 안 하면 누가 합니까.

"아이들이 스스로 해야죠. 그건 걔네 일이잖아요. 난 그저 먹여주고 키워줄 뿐이죠."

―아이가 그러다가 수업시간에 준비물을 빼먹을 수도 있고, 발표를 잘못할 수도 있지 않나요.

"그것도 걔네 책임이고 몫이죠. 엄마가 아이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데 어쩌겠어요? 난 오로지 아이들이 학교 다녀왔으면 '재미있었니?'라고 묻는 게 다였어요."

―여전히 많은 엄마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다가 아이가 뒤처지게 될까봐 불안해하는데요.

"그래서 선행학습이라는 걸 다들 목숨 걸고 시키는데, 난 묻고 싶어요. 남들보다 먼저 조금 빨리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빨리 하는 것보단 끝까지 하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 그리고 다들 이미 알고 있어요. 그렇게 돈을 잔뜩 들여 공부시켜봤자 아이의 앞날이 탄탄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남들이 하고 있으니까, 남들만큼 안 하면 불안하니까 하는 거죠. 아닌가요?"

박혜란의 책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에는 그가 연희동 12평(39㎡) 아파트에서 연탄을 갈아가며 기저귀를 빨고 청소를 매일 하면서 세 아이를 키우다가 어느 날 문득 '더는 허리가 아프고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보통 엄마라면 아이에게 '제발 좀 그만 어질러라'고 화를 냈을 텐데, 박혜란은 이때 '청소를 안 하면 일이 줄어들고 아이를 잡을 일도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날 이후 청소에 집착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고 털어놓는다. 대한민국 수많은 엄마가 '나를 해방시켰다'고 말하는 바로 그 구절이다.
 
박혜란은 “나는 아이들을 가르쳐본 적이 없다. 그저 아이들과 소파 위에서 끊임없이 살을 비비고 살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세 아이의 어린 시절 엄마와 아이들이 소파에 함께 앉아있다. 왼쪽부터 첫째 동훈, 박혜란과 그 품에 안긴 셋째 동윤, 그리고 둘째 동준(가수 이적)이다. /나무를 심는 사람들 제공
―당시 중국집 배달부가 집에 올 때면 '이사 가느냐'고 놀라곤 했다죠. 집이 워낙 어지러워서.

"아이들은 치우면 또 쏟아놓고, 치우면 또 어지르잖아요. 정리하다 지쳐서 생각해봤어요. 이걸 또 치우기 싫다고 아이에게 '장난감 좀 그만 가지고 놀라'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는지. 그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청소를 그만두기로 했죠. 아이에게 잔소리를 안 하니 저도 아이도 편했어요. 전 지금도 우리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자라난 게 다 그렇게 정돈하지 않는 집에서 실컷 놀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엄마부터 크세요

―둘째를 낳기 직전에 육아에 전념하려고 회사를 관두셨죠.

"사실 그 얘기가 나오면 후배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그땐 육아휴직도 없었고 안식년도 없었어요. 첫 아이를 낳고 딱 21일 만에 출근했는데, 남자 동료들은 '옛날 엄마들은 혼자 탯줄도 끊어가며 아이 낳고 밭일했는데 요즘 여자들은 20일씩이나 쉬고 나온다'고 수군댔어요. 둘째까지 갖고 나니 주변에서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일을 더 하느냐.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 시선을 견디기 쉽지 않았고, 나 역시 지쳐 사직서를 냈죠.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일을 그렇게 맥없이 그만두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많은 워킹맘은 일하느라 종일 아이와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느끼는데요.

"괜한 자책감일 뿐이에요. 어떤 후배들은 '선배는 그래도 10년 동안 집에서 아이를 키웠으니 아이가 안정감을 느끼지 않았겠느냐'고 하죠. 그럼 난 '우리 아이들 정서가 안정된 건 내 성격이 안정적이어서야. 내가 집에 있어서가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온종일 아이를 끼고 있으면서 우울해하고 괴로워하는 엄마 많이 봤어요. 그런 엄마랑 24시간 붙어 있으면 그 아이가 안정적일까요? 난 다행히도 꽤나 둔하게 태어났어요. 웬만한 일은 대범하게 넘기는 편이고, 예민하게 아이를 키우지도 않았죠. 남편도 나도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고요. 내가 일을 계속했다 해도 우리 아이들 성격은 지금과 똑같았을 겁니다."

박혜란은 39살에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여성학 공부를 시작했다. 막내아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이었다. 당시 시어머니는 "여자 나이 마흔은 환갑과 마찬가지인데 무슨 공부를 다시 하느냐. 아이들은 어쩔 거냐"면서 반대했다. 박혜란은 시어머니를 붙들고 "아이만 키우고 사신 게 좋으셨어요?"라고 물었고, 시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사실은 나도 조금 늦게 태어났으면 공부도 더 하고 일도 했을 거다"라면서 "그럼 내가 뭘 도와주랴"고 했다고 한다. 당시 박혜란의 대답은 "김치 좀 담가주세요"였다. 박혜란은 "그때 시어머니와 처음으로 연대감이라는 게 생겼다"고 했다.

―손주가 이제 6명이죠. 세 며느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다들 지금은 전일제로 일을 하진 못하고 있어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도 하면서 강의를 나가거나, 연구교사를 준비하고 있는 식이죠. 첫째 며느리는 우리 큰아들보다 훨씬 더 똑똑해요. 과학자인데 아이가 아프면서 연구소 일을 그만뒀어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워킹맘이 자기 일을 계속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선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요즘 강연할 때도 엄마들에게 '엄마부터 커야 한다'고 하시죠.

"아이 들여다볼 시간에 나를 들여다보라고 하죠. 백 살까지 살아야 되는데, 아이만 키우면서 살다 보면 나중엔 내 삶을 감당할 힘이 없어져요. 이런 얘기 하면 어떤 엄마들은 '일단 아이 다 키워놓고 할게요'라고 대답하는데 그럼 아이를 다 키우는 게 언제입니까? 대학 갔을 때? 결혼시켰을 때? 아이는 이미 자랐어요. 그걸 결정하는 건 '통념'이 아니라 '엄마의 의지'죠."
 
박혜란씨네 부부 손주들과함께 올망졸망한 손주 다섯 명과 나란히 붙어 앉은 박혜란씨네 부부. 막내 손녀가 태어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지금은 손주가 여섯 명이다. /박혜란 제공
함께 키우는 공동육아

박혜란은 현재 사단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 교육' 이사장이다. 공동육아 협동조합을 만들고, 전국에 공동육아 어린이집 70곳을 세웠다. 첫 번째로 만든 어린이집이 1994년 성미산 마을 회원들이 만든 '우리 어린이집'이다.

―공동육아라는 건 어떤 건가요?

"공부를 안 가르치고 무조건 자연 속에서 아이를 뛰어놀게 하고 싶은 부모들을 위해 어린이집 만드는 걸 돕는 거예요. 뜻이 맞는 부모들이 모여서 돈을 똑같이 내고 작은 마당이 있는 전셋집을 하나 삽니다. 우리는 그걸 부모 참여형 어린이집으로 만들어줘요. 교사도 보내주고 커리큘럼도 짜줘요. 조합원 교육도 계속하고요. 아이들은 그 안에서 텃밭도 가꾸고 나들이도 가고 친구들과 놀죠. 초등학생들을 위한 방과 후 교실도 지원하는데 지금 전국에 16개쯤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란 아이들은 공교육에도 적응을 잘하나요?

"다들 정말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로 잘 자라줬어요. 요즘 아이들이 걸핏하면 '도전을 모른다', '실패를 미리 두려워한다'이런 말을 듣는데, 공동육아로 자란 아이들은 보통 반대예요. 작년엔 전국 공동육아 조합인 체육대회를 했는데, 한 4000명 정도 모였어요. 이때 1기로 어린이집을 졸업한 친구가 결혼해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왔고요. 자기 아이도 공동육아로 키우고 있다고. 그럴 땐 참 가슴이 벅차죠."

―세 아드님도 그럼 지금 아이를 선생님처럼 방임형으로 키웁니까?

"전 제 아들 녀석들의 육아에 전혀 간섭하지 않아요. 어떤 아이는 저처럼 풀어놓고 아무것도 안 가르치고, 어떤 아이는 그래도 영어학원은 보내고 하더군요. 큰아들은 저처럼 공동육아를 하기 위해 과천으로 이사를 했어요. 손주 몇 녀석이 그렇게 공동육아로 컸죠."

아빠가 함께 키워야 행복하다

―남편은 어떤 분이십니까.

"대학교 연극반 선배였어요. 6년인가 연애하고 남편이 군 복무 중에 결혼했어요. 제대 후 남편은 작은 외국계 회사에 취직했고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보니까 이 남자가 겸손해서 과묵한 게 아니라 워낙 아는 것이 없어서 말이 없는 것이더라고요(웃음). 연애할 땐 성격이 점잖아서 좋아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그 성격 때문에 연탄도 창피해서 못 갈아준다고 하고! 술 마시고 종종 늦게 들어왔는데 둘째 아이 낳은 날엔 아침에 들어왔어요. 아, 그때 이혼했어야 했는데!"

―아이 교육엔 적극적이셨나요.

"그다지요. 종종 늦게 들어오고, 신경 별로 안 쓰고. 그렇지만 잔소리도 별로 안 했어요. 나와 우리 아이들을 그저 믿어줬죠.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좋은 교육이 또 있었나 싶어요. 덮어놓고 믿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요."

―아드님들은 그래도 육아에 적극적이죠?

"아빠보단 훨씬 적극적이죠. 며느리 보기엔 미진할지 모르지만, 기저귀도 직접 갈고, 아기띠도 메고 다녔죠. 그걸 보면 기분이 좋아요. 아이가 아직 어릴 때 함께 그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을 테니까요."

―세 며느리가 친구처럼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거의 매주 시댁에 오고요.

"아이를 혼자 보면 힘든데, 여럿을 모아놓으면 놀리기 쉽잖아요? 그래서 매주 우리 집에 오는 거죠. 남들은 이 얘기를 들으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며느리들이 매주 시댁에 오느냐'고 난리예요. 별것 없어요. 손주 녀석들은 같이 놀리고, 며느리들에겐 부엌에 못 들어오게 해요. '내 부엌에 왜 너희가 맘대로 들어오느냐'고 하죠."

―비결이 거기에 있었네요.

"돌아보면 난 예전에 시댁 가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부엌에만 있어야 되니까 힘들고 싫었어요. 그걸 며느리들에게 왜 물려주나요. 그래서 내가 밥을 하는데, 대신 대충대충 해요. 들통에 푹푹 끓이는 닭찜이나 갈비찜 같은 거나 하고, 두부 좀 부쳐주는 식이죠. 돌아보면 아이를 키울 때도 비슷했어요. 나는 평생 잔소리 듣는 걸 무척 싫어했어요. 그래서 내 아이에게 똑같이 잔소리를 안 했던 것뿐이에요. 육아라는 건 어쩌면 별것 없어요. 내가 하기 싫은 것 아이에게 안 시키고, 나도 피곤한 것 아이에게 강요 안 하면 되는 거예요."

인터뷰를 마친 오후, 사진을 몇 장 더 찍기 위해 사진기자와 함께 박혜란의 서초동 아파트를 찾아갔다. 벽 곳곳에 손주들이 그린 낙서가 나붙었고, 세 아들의 어린 시절 사진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박혜란은 그 사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란 참 순식간에 커요. 그죠? 이 찬란한 순간을 제발 실컷 누려요.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아요. 정말이라고요."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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